“장르불문” 이정은의 화양연화 [이슈&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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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브이데일리 이기은 기자] 배우에게 전성기라는 단어는 불필요한 한계선일뿐이다.
나이와 성별과 국적에 상관없이 ‘다른 개체’에 빙의하는 이들에게 시도 때도 없는 변신은 직업적 숙명이며 무한 성장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요즘의 이 배우를 보면 ‘리즈시절’이라는 관용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바야흐로 이정은(49)의 화양연화가 시작됐다.


1991년 연극 무대 ‘한여름밤의 꿈’을 통해 데뷔한 이정은은 오랜 무명기간을 거친 오리지널 실력파 배우다.
지금으로부터 약 28년 전 앳된 20대 초반이었던 이정은은 공식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성년부터 시작해 인생의 3분의2를 연기 커리어에 오롯이 바쳐온 케이스다.
연기에 대한 동물적 감각, 끝없는 열정, 성실한 노력 덕분에 그의 현주소는 캐스팅디렉터들 사이에서 ‘전천후 연기자’로 통한다.


실제로 연극 무대에서 쌓아온 공력은 브라운관, 스크린에서도 여과 없이 빛을 발했다.
‘변호인’, ‘곡성’, ‘검사외전’, ‘택시운전사’, ‘옥자’, ‘미쓰백’에 이르기까지 단역, 조연을 가리지 않고 소화해낸 그는 올해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서 숨겨진 주연으로 활약하며 영화의 블랙코미디 기조에 신의 한 수를 보탰다.


이정은의 연기 기술(skill)은 무엇보다 미스터리를 구현해내는 무심(無心)한 외피에 있다.
‘기생충’ 초반까지 부잣집 가정부로 유유자적 살아가는 듯한 그의 실체는 완벽히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정은의 중후반부는 달랐다.
그의 연기엔 끝내 본색을 드러내고야 마는 인간의 야수성이 내재돼 있다.


내면에 숨겨져 있는 인간의 다채로운 반전 면모는 문학, 영화, 드라마, 나아가 인생의 본질을 함축한다.
이정은이 지금껏 맡아온 숱한 캐릭터는 작품의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은 소소한 풍경이었지만 들여다보는 순간 강력한 핵으로 거듭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로테스크 뒤의 슬픔, 무뚝뚝함 뒤의 다정, 비루함 뒤의 기품, 폭력 뒤의 연민. 이정은은 그렇게 존재의 이면을 고심했고 전달했으며 비로소 일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사람 냄새를 풍기는 인격체로 거듭났다.


지난 21일 인기리에 종영한 KBS2 수목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극본 임상춘 연출 차영훈)에서 동백이 엄마 역을 소화한 이정은은 범대중적인 인지도를 확보하는데 성공하며 ‘국민 배우’ 반열에 올랐다.
극중 배고픈 어린 딸 동백을 내다버릴 수밖에 없었지만 누구보다 동백을 사랑하는 그는 엄마라는 페르소나의 부담감과 그에 따른 양가감정을 설득해냈다.


치매를 앓고 있으며 말수가 적기에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동백 엄마의 특질에 따라, 이정은은 특유의 퉁명스러운 표정 연기와 욕지기 대사를 자연스럽게 처리하며 이 시대의 개성적 중년여성 초상화를 만들어냈다.
특히 극중 그가 다낭성 신장질환을 앓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정은이 보여준 1분 눈물 연기신은 시청자들의 감수성을 제대로 자극했다는 평가다.
일명 “수도꼭지 유발자”라는 수식어가 등장했을 만큼 이정은은 눈물 연기에서도 더할 나위 없는 소질을 보였다.


배우의 상복으로만 그 배우를 평가 절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제40회 청룡영화제 여우조연상을 거머쥔 이정은은 올해의 배우이자 30년 간 한결같이 연기를 잘 해낸 프로페셔널임은 분명하다.
수상소감조차 “제 마음이 혹시 자만할까 싶었다”는 겸양을 표출한 그는 “어떤 역할을 하든 작품 안에서 살아 숨 쉬는 배우가 되길 원했다.
때문에 짧은 등장에도 늘 나 자신을 온전히 담으려 노력해왔다”(마리끌레르 인터뷰)는 허심탄회한 직업관을 고백해왔다.
어떤 작품에서든 시선을 강탈한 그의 존재감이 단박에 이해되는 대목이다.
비로소 그의 연기 중독, 동시다발적인 대한민국의 ‘이정은 중독’이 예고됐다.




[티브이데일리 이기은 기자 news@tvdaily.co.kr / 사진=신정헌 기자, KBS, 영화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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