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낙연 '공감 화법' 외교, 1억6000만 방글라데시 마음을 움직였다

아주경제 / 원승일 기자

2019-07-16 03:07:50

14일(현지시간) 오전, 여러 대의 차들이 행렬을 이뤄 방글라데시 도심 한복판을 지나갔다. 출근길이었던 수십만 방글라데시인들이 멈춰선 채 이를 지켜봤다.

지난 13~15일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를 방문했던 이낙연 국무총리는 그만의 외교방식으로 벵갈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호평을 받았다.

세이프자만 초두리 국토부 장관, 셰이크 하시나 총리를 잇달아 만나 투자·개발·교육·교역 등 양국의 협력 방안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이 총리만의 순발력과 위트가 담긴 ‘공감 화법’이 곳곳에서 묻어나왔다.

14일 한국 의류 제조기업 ‘영원무역’ 다카 공장을 찾은 자리에서 그는 “내 심장은 여전히 정치인”이라고 말해 화제가 됐다.

이 총리는 이날 초두리 방글라데시 국토부 장관에게 영원무역이 항구도시 치타공에 조성한 한국수출공업단지(KEPZ)에 대한 방글라데시 정부의 지원과 협조를 요청했다.

그는 “이후의 일정 귀국 때까지 (제가)어떤 마음으로 돌아갈 것인가, 어떻게 방글라데시를 기억할 것인가, 초두리 장관님의 말씀에 크게 좌우될 것입니다”라며 모두발언을 마무리했다.

참석자들 모두 웃었지만 방글라데시 고위직 관료에게는 가볍게 넘길 수만은 없는 부드러운 압박이었다.

초두리 장관은 “저도 장관이 되기 전에 사업가였고 지금 공직에 있지만 심장은 기업인“이라며 “한국의 KEPZ 투자를 고무적으로 생각한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지만 이런 투자가 안전하게 유지될 것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고 답했다.

‘노스페이스’ 유명 아웃도어 의류로 유명한 영원무역은 지난 1980년 방글라데시에 처음 진출했다. 현재 방글라데시 의류 산업에서 누적 투자 규모가 가장 큰 외국계 기업으로 현지 고용 인력 규모만 6만4000여명에 달한다.

영원무역은 방글라데시 항구도시 치타공에 조성한 KEPZ의 소유권 이전 문제를 겪고 있다. 20년째 이 일대 토지 소유권에 대한 방글라데시 정부의 인허가가 나지 않은 상태다. 그리고 치타공은 초두리 장관의 지역구다.

KEPZ 소유권 이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 총리만의 치밀한 셈법이 작용했다.

이 총리는 “KEPZ는 방글라데시의 것입니다. 초드리 장관님 지역구의 재산입니다. 세계의 청년들, 젊은 기업인들이 KEPZ를 보며 방글라데시에 더 투자하고 싶고,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KEPZ)문제가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생산적 대화가 되길 원합니다. 저도 지금 이 위치(국무총리)에 있지만, 여전히 제 심장은 정치인입니다"라고 덧붙였다.

“내 심장은 기업인”이라는 초두리 장관의 발언에 대한 맞장구치고는 자칫 민감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 조사에서 선두권에 있고, 내년 총선 출마설까지 나오는 상황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방글라데시를 공식 방문한 이낙연 국무총리가 14일(현지시간) 수도인 다카시의 영원무역 다카공장을 방문해 생산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 총리는 영원무역 공장도 둘러봤다. 공장에는 수백명이 넘는 방글라데시 여성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었다.

그는 초두리 장관에게 “제 누이동생도 가난해서 소녀시절 봉제공장에서 일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대학을 48살에 졸업했어요. 일하는 직원들을 보니 내 누이 같은 생각이 듭니다”라고 말했다.

공장 시찰을 마친 뒤 이 총리는 “KEPZ는 복잡한 문제다. 그래서 새로운 관점으로 투자자들에게 이게 얼마나 매력적으로 보이겠느냐고 (초두리 장관에게) 이야기한 것이다. 미래지향적인 접근을 하자고 한 것”이라고 털어놨다.

짜 맞춰 보니 외교적 목적이 다분한 계획적 발언이었다.

‘KEPZ는 방글라데시의 것’, ‘그곳에 세계 청년들이 투자하고 싶고, 누이 같은 분들이 더 많이 일할 수 있다’는 치켜세움 뒤에 ‘KEPZ 문제는 당신이 풀어달라’는 요구가 있었던 셈이다.

이 총리는 이어 셰이크 하시나 총리를 만나 "한국 기업들은 방글라데시 정부가 추진 중인 경제특구 진출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며 ‘한국 전용 경제특구 조성’을 제안했다.

KEPZ 소유권 문제 해결에 이어 국내 기업 진출의 발판이 될 경제특구 조성이라는 퍼즐이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방글라데시를 떠나기 전 이 총리는 “내 마음은 정치인”이라는 발언의 함의를 “미래지향적인 조정”이라고 했다.

이미 중국, 일본 기업은 ‘포스트 차이나’ 국가로 급부상한 방글라데시를 주목하고 있었다. 중국은 연간 1억달러 규모의 투자를 최근 10억달러로 10배 가량 늘렸다. 일본도 여의도 면적보다 넓은 200곳 이상 수용이 가능한 기업 전용 산업단지 조성에 들어갔다.

일본 수출 규제와 맞물려 수출 다변화를 꾀해야 하는 한국으로서는 서남아시아, 방글라데시가 새로운 기회의 땅이 될 수 있다.

때문에 이 총리의 ‘정치인’ 발언은 방글라데시와의 경제협력 확대, 크게는 한국 기업 전용 경제특구 조성, 작게는 영원무역의 KEPZ 소유권 문제 해결을 위한 ‘정치적’ 발언이었던 셈이다.

기업인이 눈 앞에 사익을 좇는다면 정치인은 미래의 국익을 위해 조정 역할을 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인구 1억6000만 세계 8위 규모로 연간 7% 성장대를 보이고 있는 방글라데시지만 다카 반대 편에서는 사람들이 홍수로 불어난 물을 연신 퍼 내고 있었다.

비만 오면 배수가 안 돼 도시 침수를 겪고, 교통은 차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수장이었다. 외연의 성장과 달리 인프라 구축 등 내적 성장이 여전히 절실해 보였다.

이 총리는 방글라데시와 같은 저개발국가를 대상으로 ‘최고의’, ‘제공한다’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다고 했다. ‘국가 대 국가‘ 대등한 관계가 아닌 상대국에 베푼다는 오해를 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상대방을 배려하고 높임으로써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기술, 총리던 정치인이던 관계없이 그만이 가진 '공감 화법' 능력이었다.

이 총리는 "하시나 총리님의 비전과 영도 아래 방글라데시가 최근 10년간 매년 6% 이상 성장했고, 올해는 8% 넘는 경제성장을 달성할 것으로 전망된다"며 "그 놀라운 경제성장이 마치 저의 일처럼 기쁘다"고 말했다.

이날 출근길에 바쁜 방글라데시인 중에는 길을 막고 서 있는 이 총리의 행렬이 짜증이 났을 수도 있다. 세월이 흘러 2041년 방글라데시가 선진국 대열에 들었을 때, 이때의 짜증이 '그땐 그랬지' 추억으로 바뀔 날도 머지 않았다.
다카, 방글라데시=원승일 기자 won@a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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