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총기규제의 역설

아주경제 / 김태언 기자

2019-08-22 17:08:39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너무 늦었다(Too Late).”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미국의 총기 환경을 이 한마디로 정의했다. 이미 2억5000만정 이상 유통된 미국 내 총기숫자를 두고 이제서야 총기소지를 제한한다는 것이 사실상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미국에서 총기 소지에 대한 논란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미국 수정헌법 2조에 명시돼 있는 “미국민은 무장할 권리를 갖는다”는 조항은 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미국민에게 신성불가침의 조항으로 인식된다.

수많은 총기사건에도 불구하고 총기규제 논란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국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골칫거리 중 하나다. 과연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지. 어떻게 줄여나갈 것인지. 매번 정권이 바뀔 때마다 되풀이 되는 골칫거리다.

◆인종차별이 문제인가? 총기소지가 문제인가?

최근 연이어 미국 전역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벌어지면서 미국이 또다시 공포에 휩싸였다. 뉴욕, 캘리포니아 등지에서 연속해서 사건이 벌어지더니 텍사스와 플로리다에서도 참사가 벌어졌다.

특히 총기 소지에 있어서 가장 전향적인 지역인 텍사스에서 벌어진 총격 사건의 파장이 크다. 이번 텍사스 사건에 최소 20명 이상 죽고 20여명 이상이 부상했다. 올 들어 최대 희생자를 낳은 사건이다. 범인은 21세 백인 남성인 패트릭 크루시어스다.

그는 범행 직전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 ‘에잇챈(8chan)’에 인종차별주의적 내용의 성명서를 작성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폭력적 극단주의자들의 플랫폼으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진 가운데 ‘에잇챈’은 공식서비스를 종료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미국 정치권에서는 책임 공방이 뜨겁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총기 규제 강화를 위한 제도 개선과 대량 살상 범죄자에 대한 강력한 법 집행을 약속했다.

그는 비디오 게임 등을 통한 폭력 미화 풍조에도 우려를 나타내고 총기 범죄를 도모할 수 있게 방치한 인터넷 공간의 개선 노력을 요구하는 등 문화적 변화도 촉구했다.

민주당은 대통령이 민주당 지도부를 겨냥한 인종차별적 발언이 이번 사태를 불러왔다고 맹비난했다.

민주당은 총기규제 문제를 이번에는 그냥 넘지기 않겠다고 공언했다. ​민주당은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이 전미총기협회(NRA)의 강력한 로비에 휘둘려 이번에도 총기 규제는 뒤로한 채 개인적인 일탈 문제를 부각시키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동안 침묵을 지키던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도 이 같은 의견에 가세했다. 그는 지난 5일 공식 성명을 내고 “이번 참사에 희생된 고인들에게 유감을 표한다. 미국만큼 총기폭력을 용인하는 나라는 없다”며 총기규제법 개정을 거듭 촉구했다.

 

공격용 총기, 전미총기협회(NRA)에 반대하는 시위대[사진=UPI·연합뉴스]



◆정치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미국최대이익단체 ‘NRA'

미국에서 총기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언급되는 단체가 NRA다. 정치학 교과서에 등장할 만큼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NRA는 미국 최대이익 단체 중 하나다. 그동안 총기규제를 촉구하는 일반 여론은 높았지만 번번이 NRA의 로비에 막혀 입법화에 실패했다.

NRA의 역사는 뿌리깊다. 남북전쟁 직후인 1871년 북부연합군 장성들의 주도로 결성돼 150년 가까운 역사를 지녔다.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랜트 장군을 비롯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존 F. 케네디, 리처드 닉슨,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등 9명의 역대 대통령도 NRA 회원이었다. 트럼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500만 회원을 주장하는 NRA는 전통적으로 공화당을 후원해온 이익단체로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말로는 총기규제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막상 규제법안에는 소극적 태도를 보여온 배경이다.

이러한 NRA의 영향력이 최근 크게 줄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잇따른 국내 총기참사로 총기에 대한 일반 여론이 악화하고 있는 데다 NRA 자체도 내홍으로 지도부가 교체되는 등 혼란을 겪고 있는 탓이다.

총기거래 강화법안을 공동 발의한 피트 킹 공화당 하원의원은 미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NRA가 예전처럼 강력하지 않다"면서 "만약 트럼프 대통령이 지금 의회에서 총기규제법안을 추진한다면 NRA가 이를 저지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한 줄리언 카스트로 전(前) 샌안토니오 시장도 "10년 전과 비교해 NRA에 반대하는 정치인들이 많이 늘어났으며 미국 정계에 대한 NRA의 장악력이 많이 완화된 상태"라고 전했다.

AP통신이 지난해 말 실시한 총기규제에 대한 찬성 여론은 70%에 근접한 것으로 나타났다. 오바마 행정부 시절 각종 총기사건에도 꿈쩍않던 규제 여론이 부쩍 높아진 것이다. AP는 미국에서 총기규제에 대한 목소리가 가장 높아진 시점이라며 지지부진하던 총기규제법안들이 통과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고 평가했다.

◆‘적기법’ 도입 가능성 제고, 미국민 인식 전환점 마련되나?

미국 의회에 계류 중인 새로운 총기규제법 이른바 '적기법'(붉은깃발법·red flag laws)은 경찰이 위험인물의 총기 소유 금지를 법원에 청원할 수 있도록 한 내용을 담았다.

법안에 따르면 타인에게 위험하다고 여겨지는 인물들로부터 법 집행기관이나 친척이 총기류를 일시적으로 가져갈 수도 있다.

이 법안은 총기 소지의 자유가 인정된 미국에서 공공안전이라는 공동체의 더 큰 가치를 지키기 위해 헌법에서 보장하는 개인의 총기자유에 제약을 가한다는 평가다.

하지만 실제 법이 시행되도 실효성을 얼마나 거둘지는 미지수다. 수세대에 걸쳐 총기소지에 관한 미국인들의 인식의 뿌리가 워낙 깊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어려서부터 총과 친근하다. 기본적으로 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직도 많은 미국가정이 총기류를 자연스럽게 배치하고 있으며 주말마다 부모와 자녀들이 사격장에 함께 가는 모습이 익숙하다.

지난해 1월 유튜브에는 총기류 홍보 영상으로 10대 소녀가 소총으로 인간 형상의 타깃을 잇달아 명중시키는 영상이 공개돼 높은 조회 수를 기록했다.
 

미국 어린이들에게 권총 사용법에 대해 알려주는 한 유튜브 방송 화면[사진=유튜브 캡처]



심지어 미국에는 어린이용 총기전문 잡지도 있다. '주니어 슈터'는 2009년 여름호에 '부시마스터 AR15' 반자동 소총 예찬 기사와 함께 해당 총기 할인권을 첨부했다. 잡지는 어린이 독자에게 할인권을 부모에게 보여주라고 권유하면서 "혹시 아느냐. 크리스마스 아침에 AR15가 트리 아래에 놓여 있을 수도 있다"고 적기도 했다.

버몬트나 일부 주에서는 여전히 별도의 등록절차 없이 총기소지가 가능하다. 16세 이상만 되면 부모의 동의없이도 총기를 구매할 수 있다.

중부 도시에만 가도 월마트 같은 수퍼체인에서도 총기를 쉽게 구매한다. 마치 백화점에서 물건을 고르듯 권총부터 라이플까지 일목요연하게 진열돼 있다.

미국 LA의 한 교민은 “미국인의 총기에 대한 애착은 우리 정서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며 “자녀나 친구에게 이사나 생일 선물로 총기류를 준다든지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미국인들의 총기에 대한 인식은 사회 곳곳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유튜브에는 미국인들의 총기 관련 영상이 수백만 건에 달하며 이를 위한 연습 방어도구로써 총기를 사용하는 법이 자세히 설명돼있다.

강력한 총기규제를 시행중인 캘리포니아주에서도 연달아 사건이 터졌다. NRA는 이런 근거로 총기 사고는 정신질환과 증오가 문제라는 입장을 보이며 총기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교육과 사회인식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을 펼친다.

또 다른 미국 교민은 “미국에선 총기 구입이 운전면허 취득보다 쉽다는 말이 있다”며 “미국은 광활한 지역이다. 각 주마다 다른 상황이 있다. 주법으로 총기규제를 제어할 수는 있지만 연방법으로 이를 일괄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적기법에 대해서도 “지금의 총기규제는 이미 NRA도 받아들일 수 있는 모양새로 보인다”며 “관련 규정에 있어 매년 라이선스 갱신을 의무화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급진적인 법안이 도입되지 않는 이상 미국인의 총기에 대한 인식은 쉽게 바뀌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언 기자 un7stars@a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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